화물차 운전자 절반이 건강검진 없이 운전
수면부족 일상화…심혈관질환 발생률 3배↑
‘운전자 건강상태 확인 의무화’ 법제 절실

 

화물차 운전자의 절반 이상이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질병의 위험성을 안고서 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던 25톤 화물차가 앞서가던 차량 9대를 잇달아 들이받으며 승용차 운전자 5명이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평소 지병을 앓던 화물차 운전자 박 모 씨(53)가 운전 도중 정신을 잃으면서 사고를 낸 것으로 분석했다.

 

화물차 운전자 고령화와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생긴 ‘질병운전’ 그리고 이로 인한 교통사고 사례는 최근 여러 언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대형차의 경우 언제든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심각성이 배가된다.

안전보건공단 산하 한국산업보건연구원이 화물운수업 종사자 303명을 상대로 진행한 ‘사고나 건강 이상의 위험성’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약 80%가 위험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직업을 가진 이후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응답자는 57.4%에 달했다. 화물차 운전자의 절반 이상이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질병의 위험성을 안고서 도로를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운전자의 안전운전’ 못지 않게, 운전자들의 ‘질병운전’이 화물운송업계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화물차 운전자 22% 수면장애
질병으로 인한 국내 교통사고 통계는 아직까지 전무한 상태다. 하지만, 화물차운전자들의 건강상태는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가정용 수면장애 진단기(Watch-PAT)를 활용해 화물차 운전자들의 수면 시간당 호흡 상태를 진단한 결과, 94명 가운데 22.3%(21명)가 수면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톨릭대학교 서울 성모 의료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시간 운전을 지속하는 화물차운전자의 경우 정상인에 비해 과로 지수가 2배 높고 이로 인해 수면이 부족해져 심혈관질환 발생 가능성이 약 3배 높게 나타났다.

이밖에 좁은 운전석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다 보면 만성요통, 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의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 의료 전문가는 “화물차운전자들은 장시간을 앉아서 운전하기 때문에 추간판탈출증(디스크) 등과 같은 요통 증상이나 무릎 연골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돼 있어 과로로 인한 뇌심혈관계질환 발생률과 우울증 발생 가능성도 높다.”고 설명했다.

시간·비용 부담에 건강검진 외면
무방비로 질병에 노출된 화물차운전자들이 적절한 치료와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적·비용적 여건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한국산업보건연구원이 건강검진을 한 번도 받지 않은 화물차 운전자 174명을 대상으로 그 이유에 대해 묻자 48.3%가 시간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26.4%), 비용이 부담스럽다(22.4%)가 뒤를 이었다. 

종합해 보면, 화물차운전자 70% 이상이 운전이란 생업과 빠듯한 수입, 즉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화물복지재단에서는 지난 2011년부터 정기적으로 무료 건강검진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선발 인원을 선착순으로 선정하고 있어 모든 인원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장거리 운행이 잦은 화물차운전자들이 검진을 위해 하루 이틀 일을 빠지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더해 지역가입자로 가입해야 하는 건강보험공단의 건강보험료도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지입제도 하에서 ‘특수고용직노동자’로 불리는 화물차운전자들은 ‘1인 사업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운송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일감을 받아 근로자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을 하더라도 건강보험은 물론이거니와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 4대 보험 비용을 개인이 모두 부담해야 한다.

 

(출처: 한국산업보건연구원)

건강상태 체크 위한 제도적 방안 시급
고질적으로 자행되는 ‘질병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각에서는 최근 일본의 사례와 같이 적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내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 질병운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를 막기 위해 제도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 정부는 ‘도로운송법 및 화물자동차 운송사업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소위 ‘MRI 법안’으로 불리는 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운행 전 운전자의 건강상태 확인을 의무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운전자들에게만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장려했던 기존의 소극적인 노력이 유명무실에 가까운 형식상의 절차였다면, 이번 개정안은 법제화를 통해 강제성을 뒀다는 점에서 운송업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등 큰 의미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와 관련 한 전문가는 “대형 화물차 운전자가 운행 도중 도로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라며, “국내 화물차 운전자의 열악한 처우를 염두에 두고 제도적으로 질병운전을 막을 수 있는 대응안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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